퍼포먼스 <우리는/자신의-기억을-지우는-것을/허용해도-되는가?(2021)> 부분 텍스트

윤경씨, 그는 그렇게 불리는걸 좋아했다. 재은이 어머님으로 통칭되었던 내 12년의 학교 생활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윤경씨를 전파하고 다녔고, 나도 그를 언제나 윤경씨라고 불렀다. 그는 나를 재은씨라고 불러주었다. 윤경씨가 고시생이 된 것은 내 나이 스물,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리고 내가 취업에 실패하고 사랑에도 실패해서 엉엉 울며 집에 돌아올 무렵 그는 공무원에 합격했다.

어릴 적 윤경씨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라며 소풍날 참외를 깎아서 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대로 응급실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아야 했다. 참외 알러지였다. 몇시간 뒤 헐레벌떡 나타난 윤경씨는 황당해보였다. 임신때도 먹었던 참외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참외를 내가 생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보였다. 내 손을 잡고 벌벌 떨면서도 되뇌였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참외를, 못 먹는다고? 그 후에도 우리집 식탁에는 종종 참외가 올라왔다. 별 일은 아니었다. 그는 참외를 좋아했고, 난 먹으면 죽을 수 있지만 안 먹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기억소거관리부에서 일한다고 들었을 때 찰떡같은 부서를 배정받았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본인의 기억도 좀 소거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많은 것을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니까. 지나가는 혼잣말로 "반지가 어디있더라..."라고 하면 무심하게 툭 던지는 책상 서랍 세번째 칸 오른쪽, 이라는 말에 나는 소름이 돋으면서도 감사하곤 했다. 감사해야되는데 소름이 돋는 내가 역하기도 했고. 나는 내내 그가 불유쾌했다. 내가 얼마나 불유쾌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줘서. 영동대교를 아우토반같이 달리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면서도 그 짜릿한 속도를 상상하는 나의 소박한 일탈조차 눈치채고 훈육하는 사람같아서.

"윤경씨가 하는 일은 어떤 일이야?"

반년간의 도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우리의 첫 식탁은 가지고추볶음, 김치찜, 대구탕이었다. 그는 우리가 떨어져 있던 반년동안 끈질기게 매일 한국에 돌아오면 어떤 밥을 먹고 싶은지 물어왔었고 나는 그 때 마다 당장 먹고 싶지만 그곳에서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적어 보냈었다. 월요일에는 민어회, 화요일에는 롤캐비츠, 수요일에는 약과, 목요일에는 파전, 금요일에는 바밤바, 토요일에는 하루 쉬고 일요일에는 오뎅탕.

어김없이 짜고 신 식탁에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애써 피면서 실감했다. 내가 다시 그의 곁에 돌아왔다고. 먹지 않는 것들을 먹은 듯해보이기 위해서는 적절한 대화와 현란한 숟가락질이 필요하다. 윤경씨가 지금 아마도 가장 관심이 있고 많이 말할 수 있을 법한 주제를 슬쩍 꺼내서 저절로 말하게 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예를 들면 그가 요즘 가장 집중해있을법한 일. 기억관리소거부라고 했을것이다.

"윤경씨가 일하는 기억소거관리부 요즘 난리도 아니더라? 내 친구들만 해도 벌써 몇명 지우고 왔는데, 글쎄 다들 기억이 지워져서 그런가 돈 아깝다고 그러는거야. 카드값은 나가는데 돈 쓴 기억은 없으니까 억울한거지. 근데 그건 나도 똑같다? 나도 돈 쓴 기억은 없는데 잔고 보면 누가 훔쳐간거 같애. 윤경씨도 근무 끝나고 몰래 기억 지우고 그런거 아냐?"

여기에 적당히 농담하는 위트있고 애교있는, 그러나 엄마한테 적당히 관심있는 딸처럼 후훗하고 웃어주면 그만이다. 그러면 윤경씨는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하겠지. 그 있는지 없을지도 모르는 부서가 얼마나 대단하고, 자신의 일은 얼마나 사회에 도움이 되고, 동료는 얼마나 우수한지. 대충 한 꼭지당 10분이 걸린다고 하면 30분, 밥그릇을 비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이제 숟가락을 적절히 대구탕에 담궈서 고춧가루를 좀 묻혀두고 김치찜의 큰 줄기로 밥을 덮은 다음 아래 있는 맨밥을 젓가락으로 퍼먹으면 그릇이 곧 빌 것이다.

"내가 자세한거는 보안때문에 얘기는 못하지만 재은아 넌 그런거 하지 마라? 엄마가 맨 처음에 이거저거 배워야 된다고 그래서 몇개 좀 쓰잘떼기 없는 기억들은 지워봤거든. 지워보니까 아유, 애초에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될 것 같으면 그냥 안 하면 되는걸 왜 하나 몰라. 다들 지우는 기억 뭔지 보면 아주 하나같이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지워. 아니 오늘은 어떤 처녀가 자기 전 남자친구들의 기억을 지워달라는거야 이제 결혼할거라고."

두근.

"처녀라니. 말이 좀 그렇다."

"결혼 안 했으면 다 처녀지 왜. 재은이 너도 처녀잖아. 아무튼 너도 그 아가씨처럼 남자친구 막 사귀지 말고 제대로 된 한명만 만나. 내가 결혼하라고 까지는 안 하는데 남자는 만나야지."

두근.

"윤경씨, 남자친구라니?"

"내가 또 주책이었니? 하긴 요즘 애들은 연애 얘기 이런거 하는거 싫어하더라."

"아니, 그 얘기를 하는게 아니잖아. 남자친구라니."

"남자친구? 그게 왜. 아무튼 그래서 말이야 근데 그 아가씨가 또 임신을 했더라고. 이거 기억 지우면 혹시 애기한테 영향 있을지 물어보는데, 그 아가씨가 예전에 한번 지운적이 있어서 그런가 이번에도 없어지면 또 못 낳을까봐 걱정이 걱정이 많더라고. 그럴거면 그냥 처음에 낳지 왜 지웠을까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