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아(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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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다. 우리는 2의 끝자락이나 4의 시작점에 가까운 여성 개체이지만, 줄곧 쌍생아같은 피아로서의 경험을 해왔다. 홀수들과 달리 ‘영과 달’은 2와 4에게 목적 없는 시간을 적어도 두 배 이상 부여한다. 육신에 붙은 영과 한 달의 주기가 갖는 생성 가능성, 또한 탈락을 겪는, 지구 온갖 것에 작용하는 만유인력 때문에 생겨난 여자들. 그중 3월의 공론장에는 이시마와 장미가 상반된 기질을 지닌 작업으로 전시를 이뤘다.

두 작가의 성별과 성 정체성의 교차점 외에 개별 작품이 내재한 특질은 상이하다. 윗세대 LGBTQ 정체성을 보유한 작가들의 작품 역시 모두 별개의 서사를 지녔으나, 이에 관한 성숙한 담론이나 창작자의 내러티브를 수용하는 매체성이 숙고 없이 ‘퀴어 미술’이란 용어로 퉁쳐지거나 도식적인 해설이 이를 전형화해왔다는 점에서 《영과 달》을 글로써 기록하는 것은 최선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두 작가의 다름과 기획자와 작가들이 호출한 요소가 형성한 결실을 되짚는 데에는 도움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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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기획의 배경에는 남한이라는 지역 안팎에서 “떼죽음” 당해온 2와 4, 나아가 그 세부 사회를 지탱하는 이들의 육신과 자아가 있다. 뉴스에도 나오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운 좋게 살아 있는 ‘나머지 우리’의 의식과 섞이지 않을 리 없다. 자신의 고통조차도 실시간 무빙이미지로 훼손하는 디지털 환경을 환기하지 않더라도, 국가의 ‘고유 식별’ 과정에서 여자로 규명된 이들의 삶은 실상 순환되는 박탈감과 회의감, 그러나 때때로 웃음 짓는 하루의 일과 안에서 뒤챈다. 그러므로 목적 없이 시작된 나의 영혼이 목적 없는 밤을 넘겨가며 만들어 낸 삶의 범주는 타자의 인생과 일치하기 어려워도, 평행으로 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이는 여태껏 이성적이라 간주되어온 범주, 그중에서도 사조나 계열로 여러 인생을 틀 지어온 미술 제도가 이제야 눈돌리기 시작한 윤곽이다.

2와 4가 적극 더듬기 시작한 이 호선 안의 세계에서 그들의 미술은 왜 ‘여성주의 미술’의 하위로 잔류하거나 노출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지를 되물었을 때, 두 작가는 현 단계의 사유를 짚었다. 첫째, 이들이 직접성을 빗겨가고자 위장을 시도했을 때, 더 큰 범주로 포괄되어버리는 실패의 문제. 둘째, 여성 권력과 비례하는 자본의 흐름이 더 좁은 공동체 안에서 순환하거나 증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는 활동을 그만두는 작가의 수를 당연하게도 증가시킨다. 그럼에도 전시에는 매 작품마다 도망치고 환생하기를 반복하는 이시마와, 기쁨의 순간을 간수하는 데에 주력하는 장미가 있다. 이들이 탐색한 가부장적 제도의 허점과 전통이 방기한 조형적 발전 가능성은 피상적 용어가 옮기지 못하는 영과 달의 시간처럼, 병렬적으로 놓여 유별한 빛을 발한다. 이시마는 제도와 닿아있는 물질의 구성과 현실에 유비한 재현 사이에서 높은 긴장감을 드러내나, 그의 작업에서 육체적 섹슈얼리티의 비중은 얕다. 반면 장미의 작품은 계승된 전통을 나직하게 거부하기에 대립의 각도는 완만해 보이나, 현상적 섹슈얼리티를 더욱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이 미묘한 균형의 무게를 안배한 것은 박혜정의 논지다. 그는“잘 모른다는 이유로 키워드화 하는 일”1)을 배제하며, 작업간의 비준한 특성이 서로 간섭하는 과정을 회색지대(gray zone)로서 긍정했다. 용어가 침식시킨 정동과 기억 교환의 장을 확장하려는 시도로서는 다소 느슨해보일 수 있으나, 올바른 기조로 전진하는 단계로서 그의 기획은 긍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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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마, 물체와 외연의 반짝임

〈쇄파〉(2025)는 제도에 의해 희생당하는 두 여성 서사와, 이를 지탱하는 다종적인 물질 표면 및 다각도에서 촬영된 푸티지의 구조로 짜여진 영상이다. 이시마는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편만한 구조와 개인의 유리를 무빙이미지와 퍼포먼스, 설치로 토해내는 제의를 펼쳐왔다. 그의 작품은 외부적 압제에 해결책을 내놓으려 하거나, 울부짖음으로 기밀을 누설하는 여성들의 사생결단으로 시각화된다. 이번 신작은 영혼결혼식이라는, 현실의 문화정치적 폭력과 교착된 무속이 초래한 죽음의 업이 순환된다는 기제에 닻을 내리고 있다. 남녀간 결합이라는 구습을 이탈해온 여성의 영혼, 그리고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법칙에 따라 의식을 훌륭히 치렀기에 타인의 영혼을 억지로 붙든 여성. 이 둘의 시선 교환은 대화로부터 폭력적 충돌로 이어지고, 영육의 희생으로 끝난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착한 딸로 존재해온 레즈비언 여성과 현대적 법규의 경계 밖에 있는 여성은 현실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에서도 탈선한다. 이 잔혹 동화는 제도와 여성, 여성성과 육체를 가진 여성의 날카로운 대립의 형세로 위독한 가부장적 체제의 잔혹성을 모니터 밖으로 인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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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해당 영상에 지난 개인전 《소녀a의일기장속슬픔을알지못하는너는장례식에올수없어》(2024, GIMYE)에서처럼 물적 요소가 과잉된 제단을 지었다. 여기엔 여아의 손에 언젠가 닿았을 싸구려 스티커와 조악한 원단, 과일과 칼, 인형이 등장하지만 안온함은 전무하다. 무당 윤우가 또래 레즈비언 도원을 잘못된 선의로 죽인 후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지는 전 과정에서 그가 머문 곳은 날림공사에 소모되는 자질구레한 재료로 지어진 거주지다. 윤우가 후에 잘못을 깨닫고 개인적으로 고해하는 그 장소는 유감스러울 정도로 자폐적이기까지 하다. (그 비좁은 공간은 갓 성인이 되어 적은 자본으로 자취를 시작한 다수의 여성을 겨우 수용하는 환경과도 일치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사람을 죽였구나”라는 외침의 과잉 반복은 〈쇄파〉가 그들 주위의 모든 사물과 정서적 질서에 관해 ‘생각하라’고 촉구하는 언명이다. 작품을 매개로, 관객은 소수자성을 고려하지 못한 기호의 수발신이 어긋난 상황에서 진정 희생된 것과 잘못의 진원지를 관통하지 못한 쟁점들을 성찰하게 된다. 한편, 두 명분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악한은 흐릿하게만 감각된다는 점은 하나의 화두가 된다. 그들에게 정신 차리라 강요하는 외압적 법규와 돈으로 매매되는 시간과 노동력, 무지함으로 파생된 도움, ‘반문화적’ 공동체의 끼워맞추기, 이를 위해 우리가 묵인해온 작은 거짓말의 기표가 소임을 다하고 대가를 치르는 여성 주체의 도덕성보다 축소되어야 했는지도 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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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 굿판의 또 다른 요소인 기계적인 정화 장치와 사운드, 그리고 영상 밖에서 내러티브를 보조하는 〈빙하〉도 이시마의 작품을 떠받치고 있다. 〈쇄파 매니페스토〉를 주문처럼 외는 작가의 목소리와 영을 부르는 방울 소리는 선예도(線銳度) 높은 노이즈처럼 변환되어 관객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선언문이 오로지 술법을 위한 조급한 독경으로 변해가면서 위협적인 음향 효과가 되어갈 때, 이는 비로소 언젠간 일반쓰레기로 폐기될 우레탄 폼 덩어리가 드러내는 금속성과도 교환된다. 작가는 매일 진행되는 산화로 인해 반짝임을 앗아가는, 렌탈 서비스를 통해 빈 곳을 채우는 소재와 소수자를 일컫는 용어의 침식 과정을 연결했다. 불완전한 대상을 더 듣기 좋은 말로 대체하는 무리2)의 힘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아름답게’ 때 빼고 광내어 전시 공간에 올리고, 보고 만지라 지시하는 양가적 행위 역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표처럼 떠 있음을 내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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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소재라는 거름망을 거친 심상을 적극 채택해 현실 체계를 초월하는 내러티브를 이끌어갈 때, 이는 무속의 외형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결합해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알리는 신진의 한 경향으로 묶여 논평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쉬이 종속되지 않을 방편으로 작가가 도전해야 할 목표는, ‘무빙이미지와 혼합매체의 장식적 특성으로 퀴어성을 시각화해온 선배들과 다르게 메시지를 전할’ 전술적 요건을 감독으로서 다듬어가는 것이겠다. 그가 보유한 다름과 의외성은, 즉 타인의 시선을 낚아챌 일차적 목적 달성을 위해 스스로의 얼굴을 직접 등장 시키지 않았다는 점에도 있다. 이는 자기연소적 위험성을 줄이고, 그가 발전시켜온 담화에 동의하는 동료들에게 의지해 나아가는 방편이다. 각본에 맞추어 배우의 몸짓과 소품, 음성, 그래픽을 뒤섞는 연출자로서의 자아가 갖춘 힘을 밀어붙일 때, 소재에 앞서는 ‘시마 유니버스’의 양해가 작품과 관객 사이에서 더 매끄럽게 이어지리라 본다.

장미, 서로의 눈빛에 어린 반짝임 이시마의 굿판 옆에 놓인 장미의 회화와 영상은 상대적으로 고요해 보인다. 그의 시점에서 전개된 작업은 대립보다는 개인 단위에서 발생하는 접촉으로부터 발생한다. 살갗이 닿거나, 맞닿았다가 떨어진 시점을 사진으로 촬영한 장면들이 주로 옷감으로 쓰여온 오간자에 그림으로 올라갈 때. 아직 추운 봄날, 얇은 잠옷을 입고 타인의 손톱을 그의 기준에 맞춰 다듬는 퍼포먼스 〈손톱부터 손끝으로〉에서 거의 유일한 음성적 지시가 안전을 위한 세이프 워드를 묻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 그의 목소리가 덧씌워진 영상 작업 〈그리고 그 다음날도〉에 등장하는 짧은 감탄사, “오”. 이렇게 일상의 단상을 읊조리는 작품은 그러므로 새삼스럽다.

손톱만으로 사람을 탐색하는 습관과 마음에 드는 손톱 길이를 준수하는 인물에게 이끌리는 속마음의 배후에는, 분명한 성적 지향과 사랑을 주고받을 때 지켜야 할 그만의 기준이 자리한다. 나와 연인 모두에게 상처입히지 않으려는 노력, 상대가 정성스럽게 베푸는 배려를 고마워하는 서로의 합치가 이뤄졌을 때 빛을 발하는 안온함. 이같은 특성은 그의 작품 제작 배경이자 특색이 된다. 무수한 체념으로 단련하며, 타인의 조건을 면밀히 관찰한 후 상대에게 살을 붙이는 습성은 그의 회화에서 도드라진다. 장미는 전통 불화 제작 및 모사를 업으로 고려하기까지 되풀이했을 재료의 사용과 실패, 공식처럼 정해진 배합법과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전통’에 숙달된 후에야 자신만의 작업을 시작했다. 2022년부터 장미는 유리알, 유리막대, 소금, 안료, 아교, 금강사, 비단처럼 영속을 갈망했던 패권자 중심의 초상화에 쓰인 값비싼 재료를 추상의 소재로 사용하며 전통 회화의 지대에 가는 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2024년 제작된 〈Fluid module〉, 〈난초〉, 〈Liquid Powder〉, 〈얇은 가능성〉은 박물관에 소장된 걸작과 표면상으로 아주 별개의 것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이것과 저것을 이루는 물질이 근사하다는 사실은 형상이 모호한 회화의 표면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엄중한 역사에 종속되었던, 그러니까 그와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과거에 같은 성별과 계급으로 태어났다면 사용할 수 없었을 재료를 자의적인 규칙 안에서 소용하는 일, 이처럼 기포 같은 우연의 속성조차 용납되지 않는 성화의 견본으로부터 이탈해, 종교와 계급에서 누락되어온 일상을 그려내는 동안 장미의 작품 은 그가 배워온 규준으로부터 탈화했을 것이다.

《영과 달》에서 장미가 선보인 〈짧은 손톱〉 연작은 전작과 달리 여성의 몸과 동성의 만남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모사했지만, 이 역시 봉건적 권력 체계가 회화에 남긴 인습을 내버려두고 가고자 하는 길로 이동한다. ‘진짜 정말이에요’, ‘홍콩식 식당에서’, ‘곧 문이 열립니다’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 네 점은 같은 규격과 소재로 나타난다. 본래 비단을 나무 틀에 붙이고 귀한 물질로 채색하던 단계는 그가 마음에 둔 사랑의 지표를 넘어선 여성들의 몸과 일상에 헌정되었다. 당신들이 입었던 옷의 무늬를 묘사하는 데에 이제껏 수련한 세밀한 기술을 들이고, 이에 뒤따르는 긴 시간을 당연시하는 작업은 희박했던 여성 초상의 수효를 보완하고 의미 상환하기를 지향한다. 이는 거칠게 잘린 합성 소재의 천과 계절이 지나면 틀어지기 마련인 합판 틀의 한시적 성격에 긍긍하지 않는 아낌없는 태도와 내면에서 차오르는 이야기를 언제든 싹뚝 베어 반투명한 바탕에 칠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가능했으리라. 손대기 어려운 회화적 재료가 아닌, 피부를 감싸는 끈질긴 원단에 배채함으로써 맑은 겉면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 뒤는 엉망일지언정 여자친구 및 공동체 일원들과 살갗을 맞대었던 장면의 투명한 재현. 남성 초상에 익숙한 모사가가 여성 그리기에 매진할 때 지속되는 고요한 반발은 그의 강단을 드러낸다. 이탈함으로써 그가 지키고자 했던 중심에는 완력을 겨루지만 누구를 복종시키려 하지않는 접촉, 최소 2인의 여성이 만들어낸 포옹이라는 “반짝이고 귀한 것들”이 있다. 그 배경은 바로 그 때에 집중하라는 듯 비워졌다. 그가 훈련해온 빼곡한 배경 장식 묘사를 관두게 한 동력, 기교를 뽐내기보다는 순간을 수공적으로 변환한 이유에 골몰했다는 점을 솔직하게 보여주듯. 이렇게 작가의 재료 실험과 삶을 대하는 자세는 편연하게 포개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