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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는 참 유혹적이다. 입으로 들어온 것을 입으로 뱉어내면 입으로 넣었던 사실이 마치 입막음 되는 듯 한 기분. 실제로 많이도 가벼워지는 위. 찌는 지방. 얇아지는 근육. 타오르는 식도. 그 모든것을 알면서도 다시 찾게 되는 중독적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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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처음으로 섭식장애를 진단 받은건 입원 권유와 함께였다. 이미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의 거식증과, 과도한 운동, 구토. 그래 구토. 구토는 사실 내 증상 중 가장 경상이었다. 왜냐면 나는 하루에 포도 한 송이를 먹고, 반드시 6시간 이상 운동을 해야 했으니까. 스무살이었던 나는 공부도, 취미 생활도 모두 러닝머신이나 실내자전거나 천국의 계단 위에서 했다.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고, 친구와 대화하고, 물을 마시고,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고 - 그러다 기절하듯 내려와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기절하고. 다시 또 오전 수업, 연구, 운동, 기절을 반복. 생각해보면 고등학생때 나는 급식 대신 초코파이 한개 먹는 애로 어느정도 유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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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장애는 더 말라지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혐오, 지금도 충분히 마르지 않다는 현재의 자신에 대한 혐오, 그리고 미래에 언제 갑자기 다시 살이 붙을지 모르는 불안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혐오. 그러니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나를 모두 싫어하는 것에서 기인하고 그것을 땔감으로 유지되는 영원히 기름진 욕망이다.

시작 지점은 이것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이 만나 2026년 한국의 ‘나의 뚱뚱한’ 몸만을 혐오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자주 나의 몸을 죽은 몸, 거죽의 몸, 살덩이, 시체 등으로 비유하곤 하는데, 이는 죽음이나 짐승과의 연결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죽어있는 것과 다름 없는’ 상태로 여겨지는 퀴어한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 자기긍정성과는 전혀 다른 얘기로, 퀴어 불행서사라기 보다는 사회가 구성되고 있는 전제조건들에 의해 반드시 퀴어한 - 죽은 몸들은 존재해야 하고, 이번 삶에는 내가 그 요건에 해당한다는 정도의 담백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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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스에 쏟아져나오는 사이즈10-12의 mid size(한국의 약 88-99) 혹은 그 이상의 플러스 사이즈 여성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몸을 하나 하나 뜯어보면서 감탄하고 아름다워하고 갖고싶어한다. 분명 나보다 더 ‘큰’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의 경탄으로 그들이 예쁘다는 범주에 들어오며, 상당히 fuckable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갖지 못하는 곡선, 내가 갖지 못하는 허벅지, 허리, 종아리, 엉덩이, 조각조각난 여성의 신체.

그저 체화된 여성혐오와 비만혐오를 굳이 부정하면서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따라주지 않는것이 아니라, 왜곡된 자기-이미지self-image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만 흠결을 찾아 결국 자기-부정에 이르도록 설계된것이다. 동일한 흠결도 단지 타인에게 있다는 점 만으로 추앙되고, 내가 가졌다는 것 만으로 과잉되게 부정되는. 그것이 <구토>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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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는 내가 토하는 것을 촬영하면서 시작되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을 스스로 자해라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는 것이 구토이다. 손가락을 굳이 눌러 잘 소화되고 있던 위액 범벅의 음식물을 그대로 뽑아내는 것. 일상에 있는, 자연스러운 것들이 자해가 되며, 이 자해를 막기 위해 진짜 자해를 한다. 일상이자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들이 나에게 자해로서 인식되기 시작할 때 구토는 그 해방이자, 약속된 엘릭서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구토는 참 무해한 치료제란 말이다. 생각해보자. 숨쉬는 공기가 갑자기 독으로 느껴질 때, 차라리 바다로 뛰어들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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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는 화장실 큐비클 안에서 일어나는 참으로 개인적인 행위이다. 무엇이 나를 구토하게 하고 무엇이 나를 매일 구토하게 하는가를 궁금해하는 와중에도 나는 구토를 하고 있다. 퍼포먼스도 아니지만 삶의 그 어느 순간보다 나의 신체를 체감한다. 오장육부가 뒤틀려 쥐어짜지니까 아무래도 그럴 수 밖에 없다. 구토는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혼자된 신체와 이를 둘러싼 공간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부터 타인의 신체가 간섭하는 것을 물리적으로 차단한다. 그래서 나는 구토를 굳이 밖으로 확장하고자하는 욕망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렵다.

섭식장애의 일부로서의 구토는 당연하게도 사회에서 주입되는 특정한 몸에 대한 욕망과 학습이 전제된다. 그러나 이런 지긋지긋한 머리는 알고 심장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우리는 이제 잘 포장된 자기-긍정self-positivity 문화가 어떻게 왜곡된 자기 이미지를 더 악화시켜서 적극적 부정까지 이르게 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니까 과거에 이미 죽임 당한 나의 몸과, 나의 몸이 마주하는 살아있는 ‘지금’의 시차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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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가득한 포스팅, 일반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들의 좋아요 많은 릴스, 나랑 꽤나 닮아있는 인스타 셀렙. 커밍아웃해서 행복한 커플, 사람, 트랜지션 중인 사람, 살을 빼는, 살을 찌우는, 살을 내버려두는, 살을 긍정하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흠결을 찾는 것에 안달이 난 나. 이미 죽음당해 파리 날리는 시체를 어떻게든 조각내서라도 살려보려는 나의 눈물겨운 노력. 당연한 실패. 예견된 고통. 남이 나쁘다는게 아니라 내가 고쳐지지 못한 채 남들이, 사회가 너무 빠르게 스스로를 각자 사랑하고 있는 기분.

그러니까 나의 공기를 자해로 바꿔놓고 그들만 편하게 숨쉬고 있는, 모래 위에서 말라가는 해파리가 된 삶이다. 우리가 같은 눈을, 코를, 입을 공유하더라도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환경이 다르기에, 이 죽어있는 몸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픈 몸을 낫게 하는 것 보다 더 큰 충격과 노력이 필요하다. 죽어있는 몸의 범주를 변주하더라도, 나 개인의 큐비클 안의 몸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영향을 받지 못한다. 빠르게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도, 무릎꿇고 구토하는 나의 눈은 오로지 변기물에 비춰진 나의 얼룩진 얼굴 뿐이다. 이 모든것은 결국 내가 나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려 하기 때문이며, 보고 있기 때문이며, 보는 것을 이해하고 체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시차에서 기인한다. 참 괴이한 일이다.